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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 영정
- 무과를 선택하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안다. 모르는 이가 없다. 임진왜란 하면 충무공과 거북선을 연상한다. 그러나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나대용 장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75년 노산 이은상이 쓴 ‘체암 나(대용)장군 기적비’에 새긴 글이다.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체암 나대용 장군이 역할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북선 건조의 1등 공신 나대용(羅大用, 1556-1 바다이야기고래 612)은 1556년(명종 11) 나주목 거평면 오륜동(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나항과 광산 김씨 사이에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이다. 금성 나씨의 시조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뒤 ‘일등 공신’이 된 나총례다.
바다이야기게임장
나대용을 기린 벽화 (나주시 문평면 오륜마을)
본래 문장이 뛰어나 문신을 꿈꾸기도 했지만, 최종 선택은 무과였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에 임명된다. 이후 나대용의 활약은 잘 알 오션릴게임 려져 있지 않다. 1606년(선조 39)의 ‘선조실록’에는 “등과해 6년 동안은 북쪽을 방어했고”로 기술돼 있는 것을 보면, 육군 장교로 북쪽 변방을 지키는 군관으로 근무한 것 같다.
그가 거북선 제작에 참여한 것은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을 만나고서였다.
- 거북선은 어떤 야마토게임 모습일까? 임진왜란 당시 돌격선이었던 거북선에 관한 첫 기록은 1415년(태종 15) 7월16일 자 좌대언 탁신이 병비(兵備)에 대해 올린 사의 6개 항목 중 여섯 번째에 나온다.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 최후의 승패를 결정함)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마을 앞에 건립된 거북선
좌대언 탁신은 군사 방비책 중 하나로 기존의 거북선을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전승의 도구로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이후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북선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선조 25) 4월12일자 ‘난중일기’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는 기록이다.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은 건조돼 대포 발사 시험까지 마치고 있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군의 최초 전투는 동년 5월7일 옥포 전투였고, 거북선이 선봉으로 등장한 최초 전투는 5월29일의 사천 전투다. 그리고 6월2일 당포 해전에서도 거북선이 등장해 큰 성공을 거둔다.
이순신은 당포 전투의 전과를 보고한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신(臣)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해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라고 거북선의 모습과 위력을 설명하고 있다.
거북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남긴 ‘이충무공행록’이 더 자세하다.
이분은 “공(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계실 때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전선을 창작했는데 크기는 판옥선만 하며, 위를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작은 길을 내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였고, 입은 총구멍이 됐다. 뒤는 거북의 꼬리같았고, 꼬리 밑에는 총구멍이 좌우 6개씩 있다. 대개 모양이 거북 모습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귀선, 龜船)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거북선은 3층이었고, 배 상단 갑판 위에는 두꺼운 판자를 씌웠으며, 여기에 칼과 송곳을 꽂아 적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았다.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북선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거북선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거북선이 주력 군선인 판옥선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이미 살핀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이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보면 거북선을 건조한 것은 이순신으로 나온다. 그리고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이순신이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을 쏘며 최종 점검하고 있다.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북선이 건조됐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이순신이 손수 거북선을 제작할 수는 없다. 거북선의 총감독은 이순신이었지만, 현장에서의 감독은 나대용이었다. 오늘 거북선하면 ‘나대용 장군’을 떠올리는 이유다.
나대용이 이순신을 찾아뵙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이야기는 ‘체암선생행장’에 나온다.
“나대용은 신묘년(1591년)에 충무공이 본도(전라도) 좌수영에 있을 때 주부로서 집에 있다가 장차 왜적이 침략해 올 것으로 알고 사촌 아우 치용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 방어를 준비하는 계책을 깊이 말하자,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막하에 머물게 했다. 영내의 모든 일을 협의해 구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북선 3척을 건조해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매양 승리를 거뒀다.”
나대용이 이순신을 찾아간 것은 1591년(선조 24)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이었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직후였다. 나대용은 이미 살핀 것처럼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6년 가까이 북방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무과 급제 6년 만인 1589년(선조 22), 돌연 나주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2년 뒤 이순신을 만난다.
나대용은 고향에 내려온 2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김영원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이순신을 만나기 전 2년간 집 뒤뜰의 초당 벽에 거북선 설계도를 그려놓고 거북선 제작에 몰두했고, 마을 앞 방죽에서 손수 만든 거북선을 진수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자, 나대용은 사촌 동생 치용과 함께 이순신을 만나 거북선 건조를 건의했고, 이순신은 나대용을 감조 전선 출납 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으로 삼아 거북선 3척을 건조했다는 것이다.
거북선은 지휘자 이순신과 설계도를 그리고 직접 건조에 참여한 나대용의 합작품이었다.
- 창선 해추선을 만들다 나대용은 거북선 건조의 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부터 사천, 한산, 명량, 노량 해전까지 모든 전투에 참전한 몇 안 되는 군관이었다.
옥포 승첩 때는 발포 가장(假將)으로 앞장서 돌격해 적선 2척을 포획했고, 거북선이 출동한 사천 전투에서는 이순신과 함께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고 서술돼 있다.
나대용은 공적을 인정받아 1594년(선조 27) 강진 현감을 제수받았고, 이후 금구, 능성, 고성 현감을 역임한다. 수령으로서 나대용은 별로였던 것 같다. 강진 현감과 능성 현령에서는 파직당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임명된 곤양현령과 남해현령에서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과다한 음주가 한 원인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전라도 순찰사였던 한효순의 군관이 돼 ‘창선’(槍船) 25척을 건조한다. 거북선의 단점은 활을 쏘기가 불편했고, 거북선과 판옥선은 노를 젓는 격군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격군을 125명에서 42명으로 줄이고서도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칼과 창을 빽빽이 꽂은 배를 건조했는데, 이게 ‘창선’(槍船)이었다.
나대용이 건조한 창선은 임진왜란 이후 평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썩어간다. 이에 나대용은 1606년(선조 39) ‘창선’을 주조해 외환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임금은 창선이 쓸만한 지의 여부를 묻는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은 “격군 42명 만으로 바다를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선체가 협소해 좌우에 방판(防板)을 설치할 수 없고, 방판이 없으면 적의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창선’이 다량 생산되지 못하고 중지된 연유다.
1610년(광해군 2) 남해현령에 제수된다. 남해현령 시절 그는 또 쾌속정인 해추선(海 船) 3척을 건조하기도 했다.
나대용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군선의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싸움배 연구의 전문가였다.
광해군은 그 공을 인정해 1611년(광해군 3), 경기도 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군절도사(교동수사)에 제수했지만, 사천 전투에서 당한 부상이 재발해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 사망한다.
나대용 장군 묘소
- 나라에 크게 쓰이다
생가 앞에 건립된 나대용 장군 동상
거북선을 설계한 체암 나대용이 나고 자란 마을이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이다. 오륜마을에는 그가 건조한 거북선도,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그가 태어난 생가터에는 1978년 소충사가 건립돼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마을 담장에는 나대용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오늘 나대용은 여전히 오륜마을의 자긍심이다.
나대용 장군을 모신 사당 ‘소충사’
1999년 옥포 대우조선소가 건조한 1천200t급 잠수함 이름은 ‘나대용 함’이다. 그리고 나주시 문평면에서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쪽으로 난 도로명은 그를 기리는 ‘체암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체암 나대용은 거북선, 창선, 해추선 등 끊임없이 조선 수군의 군선 개발에 힘쓴 최고의 선박 기술자였고, 과학자였다. 그가 건조한 거북선은 임진왜란의 운명을 갈랐던 바다의 돌격대장이었다.
그의 이름 ‘대용’(大用)은 이름처럼 나라에 크게 쓰였다.
- 무과를 선택하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안다. 모르는 이가 없다. 임진왜란 하면 충무공과 거북선을 연상한다. 그러나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나대용 장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75년 노산 이은상이 쓴 ‘체암 나(대용)장군 기적비’에 새긴 글이다.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체암 나대용 장군이 역할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북선 건조의 1등 공신 나대용(羅大用, 1556-1 바다이야기고래 612)은 1556년(명종 11) 나주목 거평면 오륜동(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나항과 광산 김씨 사이에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이다. 금성 나씨의 시조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뒤 ‘일등 공신’이 된 나총례다.
바다이야기게임장
나대용을 기린 벽화 (나주시 문평면 오륜마을)
본래 문장이 뛰어나 문신을 꿈꾸기도 했지만, 최종 선택은 무과였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에 임명된다. 이후 나대용의 활약은 잘 알 오션릴게임 려져 있지 않다. 1606년(선조 39)의 ‘선조실록’에는 “등과해 6년 동안은 북쪽을 방어했고”로 기술돼 있는 것을 보면, 육군 장교로 북쪽 변방을 지키는 군관으로 근무한 것 같다.
그가 거북선 제작에 참여한 것은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을 만나고서였다.
- 거북선은 어떤 야마토게임 모습일까? 임진왜란 당시 돌격선이었던 거북선에 관한 첫 기록은 1415년(태종 15) 7월16일 자 좌대언 탁신이 병비(兵備)에 대해 올린 사의 6개 항목 중 여섯 번째에 나온다.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 최후의 승패를 결정함)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마을 앞에 건립된 거북선
좌대언 탁신은 군사 방비책 중 하나로 기존의 거북선을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전승의 도구로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이후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북선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선조 25) 4월12일자 ‘난중일기’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는 기록이다.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은 건조돼 대포 발사 시험까지 마치고 있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군의 최초 전투는 동년 5월7일 옥포 전투였고, 거북선이 선봉으로 등장한 최초 전투는 5월29일의 사천 전투다. 그리고 6월2일 당포 해전에서도 거북선이 등장해 큰 성공을 거둔다.
이순신은 당포 전투의 전과를 보고한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신(臣)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해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라고 거북선의 모습과 위력을 설명하고 있다.
거북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남긴 ‘이충무공행록’이 더 자세하다.
이분은 “공(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계실 때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전선을 창작했는데 크기는 판옥선만 하며, 위를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작은 길을 내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였고, 입은 총구멍이 됐다. 뒤는 거북의 꼬리같았고, 꼬리 밑에는 총구멍이 좌우 6개씩 있다. 대개 모양이 거북 모습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귀선, 龜船)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거북선은 3층이었고, 배 상단 갑판 위에는 두꺼운 판자를 씌웠으며, 여기에 칼과 송곳을 꽂아 적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았다.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북선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거북선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거북선이 주력 군선인 판옥선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이미 살핀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이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보면 거북선을 건조한 것은 이순신으로 나온다. 그리고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이순신이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을 쏘며 최종 점검하고 있다.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북선이 건조됐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이순신이 손수 거북선을 제작할 수는 없다. 거북선의 총감독은 이순신이었지만, 현장에서의 감독은 나대용이었다. 오늘 거북선하면 ‘나대용 장군’을 떠올리는 이유다.
나대용이 이순신을 찾아뵙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이야기는 ‘체암선생행장’에 나온다.
“나대용은 신묘년(1591년)에 충무공이 본도(전라도) 좌수영에 있을 때 주부로서 집에 있다가 장차 왜적이 침략해 올 것으로 알고 사촌 아우 치용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 방어를 준비하는 계책을 깊이 말하자,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막하에 머물게 했다. 영내의 모든 일을 협의해 구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북선 3척을 건조해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매양 승리를 거뒀다.”
나대용이 이순신을 찾아간 것은 1591년(선조 24)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이었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직후였다. 나대용은 이미 살핀 것처럼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6년 가까이 북방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무과 급제 6년 만인 1589년(선조 22), 돌연 나주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2년 뒤 이순신을 만난다.
나대용은 고향에 내려온 2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김영원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이순신을 만나기 전 2년간 집 뒤뜰의 초당 벽에 거북선 설계도를 그려놓고 거북선 제작에 몰두했고, 마을 앞 방죽에서 손수 만든 거북선을 진수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자, 나대용은 사촌 동생 치용과 함께 이순신을 만나 거북선 건조를 건의했고, 이순신은 나대용을 감조 전선 출납 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으로 삼아 거북선 3척을 건조했다는 것이다.
거북선은 지휘자 이순신과 설계도를 그리고 직접 건조에 참여한 나대용의 합작품이었다.
- 창선 해추선을 만들다 나대용은 거북선 건조의 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부터 사천, 한산, 명량, 노량 해전까지 모든 전투에 참전한 몇 안 되는 군관이었다.
옥포 승첩 때는 발포 가장(假將)으로 앞장서 돌격해 적선 2척을 포획했고, 거북선이 출동한 사천 전투에서는 이순신과 함께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고 서술돼 있다.
나대용은 공적을 인정받아 1594년(선조 27) 강진 현감을 제수받았고, 이후 금구, 능성, 고성 현감을 역임한다. 수령으로서 나대용은 별로였던 것 같다. 강진 현감과 능성 현령에서는 파직당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임명된 곤양현령과 남해현령에서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과다한 음주가 한 원인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전라도 순찰사였던 한효순의 군관이 돼 ‘창선’(槍船) 25척을 건조한다. 거북선의 단점은 활을 쏘기가 불편했고, 거북선과 판옥선은 노를 젓는 격군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격군을 125명에서 42명으로 줄이고서도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칼과 창을 빽빽이 꽂은 배를 건조했는데, 이게 ‘창선’(槍船)이었다.
나대용이 건조한 창선은 임진왜란 이후 평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썩어간다. 이에 나대용은 1606년(선조 39) ‘창선’을 주조해 외환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임금은 창선이 쓸만한 지의 여부를 묻는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은 “격군 42명 만으로 바다를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선체가 협소해 좌우에 방판(防板)을 설치할 수 없고, 방판이 없으면 적의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창선’이 다량 생산되지 못하고 중지된 연유다.
1610년(광해군 2) 남해현령에 제수된다. 남해현령 시절 그는 또 쾌속정인 해추선(海 船) 3척을 건조하기도 했다.
나대용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군선의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싸움배 연구의 전문가였다.
광해군은 그 공을 인정해 1611년(광해군 3), 경기도 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군절도사(교동수사)에 제수했지만, 사천 전투에서 당한 부상이 재발해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 사망한다.
나대용 장군 묘소
- 나라에 크게 쓰이다
생가 앞에 건립된 나대용 장군 동상
거북선을 설계한 체암 나대용이 나고 자란 마을이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이다. 오륜마을에는 그가 건조한 거북선도,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그가 태어난 생가터에는 1978년 소충사가 건립돼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마을 담장에는 나대용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오늘 나대용은 여전히 오륜마을의 자긍심이다.
나대용 장군을 모신 사당 ‘소충사’
1999년 옥포 대우조선소가 건조한 1천200t급 잠수함 이름은 ‘나대용 함’이다. 그리고 나주시 문평면에서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쪽으로 난 도로명은 그를 기리는 ‘체암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체암 나대용은 거북선, 창선, 해추선 등 끊임없이 조선 수군의 군선 개발에 힘쓴 최고의 선박 기술자였고, 과학자였다. 그가 건조한 거북선은 임진왜란의 운명을 갈랐던 바다의 돌격대장이었다.
그의 이름 ‘대용’(大用)은 이름처럼 나라에 크게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