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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를 불고 있는 이해인 수녀. /본인 제공
오늘은 이해인 수녀의 50년 전 일기 내용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최근 ‘해인의 바다’라는 산문집을 냈는데요. 내용은 50년 전인 1976년 한 해 동안 쓴 일기입니다. 수녀원 담장 안쪽의 이야기죠.
1976년은 이해인 수녀가 ‘종신서원’을 한 해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1976년 2월 2일 종신서원을 했습니다. 종신서원을 하기까지 12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 사이엔 예비 수녀 수련기 4년, 유기(有期) 서원기 8 바다이야기디시 년을 거쳤지요. 또한 1976년은 그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민들레의 영토’는 2월 15일에 초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종신서원 직후였지요. 이번 ‘해인의 바다’는 ‘민들레의 영토’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특별판을 내면서 쌍둥이처럼 함께 출간된 책입니다.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들이라면 난리가 골드몽릴게임 날 일이지요. 저는 처음엔 가톨릭출판사가 이해인 수녀를 설득해 옛날 일기를 공개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직접 출판사에 ‘일기장 공개’를 제안했다고 하네요. “정식 수녀가 되면서 겪은 갈등, 고민 등이 다 적혀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가 출간 이유랍니다. 책을 펼쳐보면 서른 한 살의 이해인 수 백경게임 녀가 있습니다.
기다린 기간이 길었던 만큼 종신서원을 한다는 것은 떨리고 설렜겠지요. 또한 이젠 종신(終身)토록 수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다짐도 남달랐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 가감 없이 내밀한 일기장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초발심(初發心)이라고도 하고 흔히 초심(初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지요. 책을 읽다보니 ‘정말 일기장 릴짱릴게임 그대로이네’ 싶더군요. 왜냐하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울다가 웃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거든요. 수녀님이 ‘신앙생활하는 분들에게 도움’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허술함에서 느껴지는 인간미라고 할까요,
'민들레의 영토' 출간 황금성사이트 50주년 기념판(왼쪽)과 산문집 '해인의 바다' 표지. /가톨릭출판사
가령 4월에 쓴 일기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시는 마음 좋은 분이시지만, 때로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시며 제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끌어다 놓고 시험하시기도 하는 짓궂은 분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당신이 못마땅해서 쳐다보기도 싫을 때가 없는 것이 아니었어요.”
죽음에 대한 꿈도 자주 꾸었답니다. 뭔가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어느 날 밤, 저를 데리러 왔다는 죽음의 사자를 꿈에 보았습니다. 저는 문득 죽기가 싫어져서 ‘몇 년만 더 기다려 줄 수 없어요?’라고 항의했던 일도 있습니다.”
종신서원 후 처음 맡은 일은 수녀회가 운영하던 부산의 성 분도 병원 ‘수납 담당’이었답니다. 지금처럼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손으로 돈을 헤아리며 받는 일이었지요. 제대로 된 창구도 없이 입구 한쪽에 의자 놓고 앉아서 수납 업무를 봤답니다. 처음엔 ‘벌주려고 일부러 이런 일을 시키시나?’ 싶기도 했답니다. “제 모습이 마치 돈 받는 기계처럼 느껴져서, 후딱 자리를 뜨고 싶은 순간이 연속되는 날이 월요일.”(5월 10일) “돈을 받아내야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냉정히 굴어야 하는 지금의 제 입장이 오늘은 더 슬픕니다.”(12월 29일) 같은 일기가 눈에 띕니다. 그렇지만 병원은 그에게 세상사를 이해하는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소아과 병동을 지키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주님, 모성을 포기해야 하는 우리가 자칫 무언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까 봐 문득 겁이 나곤 합니다. 늘 지켜 주시고 깨우쳐 주셔야겠습니다.”(5월 14일)라고 기도하고, 밤사이 사망해 비어 있는 병상을 보며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도자의 첫 걸음>
정식 수녀가 된 만큼 수도자로서 영성을 가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가난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아침 묵상 시간에 번번이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때려 주고 싶도록 밉기도 합니다.”(4월 29일)
“오늘처럼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고해성사로 마음도 세탁해서 하얗게 안으로 다림질해 놓은 날에는 살아 있다는 것의 행복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5월 1일)
“어느 땐 남에게 숫제 아무 말도 하기 싫은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그저 누구에게라도 불안한 마음을 터뜨려 그의 동의를 구하고 싶은, 극히 고상하지 못한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5월 11일)
그러다가 문득 “물론 어려운 길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힘이 듭니다.”(5월 17일)라고 절망감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출발할 때의 설레는 느낌과 늘 깨어 있으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5월 23일)라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입니다.
“하루라는 작은 배에 매일매일 항해의 돛을 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항상 ‘이것이 처음이다.’하는 흥분과 긴장감을 가지고 서서히, 조심스럽게 항해의 모험을 계속해야 합니다.”(6월 1일)
“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축복받은 일입니까. 어서 제 등불의 심지를 돋우어야 하겠습니다.”(6월 11일)라며 다시 마음을 다잡지요.
이해인 수녀가 산문집 '해인의 바다'를 펴내고 지난 11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북콘서트를 가졌다. 이날 행사엔 400여명이 참석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가톨릭출판사 제공
<시>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시와 기도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 쓰는 것이 보다 더 잘 기도할 수 있는 일임을 의심치 않습니다.”(6월 12일) 즉,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것이죠. 그런데 수도자 생활처럼 시 창작도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치 하느님께 응석 부리듯 이렇게도 적었네요. “5월에는 적어도 몇 편의 시를 쓰게 해 주시기를 빌고 싶습니다. 부탁이에요. 네?”(4월 30일)
수시로 “제게도 몇 줄의 맑은 시를 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투명하고 소박한 마음을.”(5월 2일) “‘반지’라는 시를 구상하고 있지만, 좀처럼 끝을 낼 수 없습니다.”(5월 21일) “오늘은 시 몇 편의 구상이 떠올라 여간 기쁜 게 아닙니다.”(7월 16일) “써야 할 텐데, 쓰고 싶은데... 그러다가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마나 봅니다.”(8월 25일)
그러다가 7월엔 ‘민들레의 영토’가 재판을 찍게 된 소식을 듣고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민들레의 영토’를 다시 찍는다는 소식은 무척도 저를 기쁘게, 또 얼마쯤은 당황하게도 만들어 줍니다.”(7월 9일)
<단체 생활의 어려움>
수녀원은 단체 생활을 하는 공간입니다. 수녀원 밖에서는 잘 모르는 엄격한 규율이 있지요. 또 단체 생활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어쩔 수가 없지요. 초보 수녀에겐 적응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기장엔 당시 감정이 솔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평화로운 매일을 갖는 게 소원입니다.”(5월 13일)
“누구와 마음을 터놓고 진정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습니다.”(5월 15일)
자신에 대한 ‘뒷담화’를 전해 들었을 때의 감정도 적었습니다.
“오늘 F수녀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자매가 제게 불만스러워 하는 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행동이 너무 느리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던 모양인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일을 민첩하게 척척 해내지 못하는 데다 언제나 생각에 깊이 잠겨 현재를 잊어버리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6월 9일)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생전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인 양 자만에 빠져 사는 게 또한 인간인가 봅니다.”(6월 22일)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며 그들이 저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다른 자매들이 원하는 것을 이왕이면 더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고 싶지만 때로는 잘되지 않습니다.”(8월 23일)
어떻습니까. 정말 솔직하지요?
<수도 영성 생활>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초보 수녀는 차츰 영적으로 성숙해 갑니다.
“요즘은 저의 기도가 너무나 기계적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특별히 분심을 하는 것도 아닌데, 또 졸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멍청히 기도 시간을 보내는 상태입니다.”(7월 28일)
예수가 물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한 일을 예로 들면서 “오, 주님. 아직도 저는 깊은 데로 가기를 꺼려 하고 있습니다.”(9월 2일)라고 고백합니다.
또 “주님, 제발 저 자신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좀 더 가난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9월 4일)라고 호소하고, “식탁에서 과일이나 그 밖의 것들을 선택할 때에도 자기 밑에 앉은 다른 이들을 위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골라 가지는 일 또한, 실은 간단한 것 같지만 얼마나 자주 무심히 넘어가는 일입니까.”(9월 11일)라고 자기반성을 합니다.
“포도를 따 먹은 손에서는 아직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옵니다. 익어서 더욱 아름답고,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열매와 같이 저도 당신 안에서 익어 가는 영혼이 되게 하소서.”(9월 25일) “제가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오직 당신 안에서만 호흡할 수 있는 사랑의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0월 4일)라고 기도합니다.
이제 막 정식 수녀가 됐지만 항상 초심을 되새기며 나태와 교만을 경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의 이 검은 수도복이 실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벗기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 수도복을 입지 않은 이들보다 더 열심히 한 것도 없고, 더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면서 ‘수녀’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대우에 익숙해져서 때로는 정말 무엇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 언제나 제가 아직 수도복을 받지 못했을 때의 그 배고픔과 갈망과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1월 5일)
“진정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구태여 남이 알아주는 큰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만 민들레가 되고 싶다 해 놓고도 장미의 화려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필요 이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제 은밀한 교만이 늘 부끄러울 뿐입니다.”(12월 3일) 같은 고백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장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일기는 연말을 향해 가면서 사랑과 기쁨이 차오릅니다.
“주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당신 안에 모여 하나로 사는 이 생활만큼 분에 넘치는 행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12월 12일)
“주님, 장미의 길을 원했던 베르나데트(세례명)였으나, 이제는 민들레의 길만을 원하는 클라우디아(수도자명)를 앞으로도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12월 31일)
<노년의 삶>
책에는 부록으로 2025년의 일기도 몇 편 실렸습니다. 50년 전 일기가 새로운 수도 생활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가득하다면 작년의 일기엔 노년의 여유와 관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노년을 산다는 것은 끝없는 인내를 실습하는 것. 하루하루가 모험의 연속이네. 육체에 대한 걱정, 관계에서 오는 긴장, 때때로 엄습하는 마음 속 두려움까지 견디어 내야 하는 시기. 그래도 웃어야지. 아직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지. 새롭게 되뇌면서. ‘또 한 번 눈을 뜨고 살아 있구나.’ ‘또 하루를 버티어 내어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드는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2025년 4월 14일)
갑작스러운 동료의 투병과 죽음, 기억을 잃어가는 원로 수녀를 보면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친지들이 찾아와 자갈치 시장을 방문하면 시장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정신을 번쩍 차리곤 한답니다.
이해인 수녀는 지난주 전화 통화에서 “이미 책을 읽은 분들이 손편지를 보내 온다”고 했습니다. ‘최근 심적으로 고민되는 일이 있었는데, 수녀님은 주님만 사랑하시니 나와 같은 고민이 없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도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란 이런 것인 모양입니다. 이제는 원로가 된 한 수도자의 젊은 시절 내면의 자화상 같은 책입니다.
오늘은 이해인 수녀의 50년 전 일기 내용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최근 ‘해인의 바다’라는 산문집을 냈는데요. 내용은 50년 전인 1976년 한 해 동안 쓴 일기입니다. 수녀원 담장 안쪽의 이야기죠.
1976년은 이해인 수녀가 ‘종신서원’을 한 해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1976년 2월 2일 종신서원을 했습니다. 종신서원을 하기까지 12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 사이엔 예비 수녀 수련기 4년, 유기(有期) 서원기 8 바다이야기디시 년을 거쳤지요. 또한 1976년은 그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민들레의 영토’는 2월 15일에 초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종신서원 직후였지요. 이번 ‘해인의 바다’는 ‘민들레의 영토’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특별판을 내면서 쌍둥이처럼 함께 출간된 책입니다.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들이라면 난리가 골드몽릴게임 날 일이지요. 저는 처음엔 가톨릭출판사가 이해인 수녀를 설득해 옛날 일기를 공개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직접 출판사에 ‘일기장 공개’를 제안했다고 하네요. “정식 수녀가 되면서 겪은 갈등, 고민 등이 다 적혀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가 출간 이유랍니다. 책을 펼쳐보면 서른 한 살의 이해인 수 백경게임 녀가 있습니다.
기다린 기간이 길었던 만큼 종신서원을 한다는 것은 떨리고 설렜겠지요. 또한 이젠 종신(終身)토록 수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다짐도 남달랐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 가감 없이 내밀한 일기장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초발심(初發心)이라고도 하고 흔히 초심(初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지요. 책을 읽다보니 ‘정말 일기장 릴짱릴게임 그대로이네’ 싶더군요. 왜냐하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울다가 웃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거든요. 수녀님이 ‘신앙생활하는 분들에게 도움’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허술함에서 느껴지는 인간미라고 할까요,
'민들레의 영토' 출간 황금성사이트 50주년 기념판(왼쪽)과 산문집 '해인의 바다' 표지. /가톨릭출판사
가령 4월에 쓴 일기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시는 마음 좋은 분이시지만, 때로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시며 제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끌어다 놓고 시험하시기도 하는 짓궂은 분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당신이 못마땅해서 쳐다보기도 싫을 때가 없는 것이 아니었어요.”
죽음에 대한 꿈도 자주 꾸었답니다. 뭔가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어느 날 밤, 저를 데리러 왔다는 죽음의 사자를 꿈에 보았습니다. 저는 문득 죽기가 싫어져서 ‘몇 년만 더 기다려 줄 수 없어요?’라고 항의했던 일도 있습니다.”
종신서원 후 처음 맡은 일은 수녀회가 운영하던 부산의 성 분도 병원 ‘수납 담당’이었답니다. 지금처럼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손으로 돈을 헤아리며 받는 일이었지요. 제대로 된 창구도 없이 입구 한쪽에 의자 놓고 앉아서 수납 업무를 봤답니다. 처음엔 ‘벌주려고 일부러 이런 일을 시키시나?’ 싶기도 했답니다. “제 모습이 마치 돈 받는 기계처럼 느껴져서, 후딱 자리를 뜨고 싶은 순간이 연속되는 날이 월요일.”(5월 10일) “돈을 받아내야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냉정히 굴어야 하는 지금의 제 입장이 오늘은 더 슬픕니다.”(12월 29일) 같은 일기가 눈에 띕니다. 그렇지만 병원은 그에게 세상사를 이해하는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소아과 병동을 지키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주님, 모성을 포기해야 하는 우리가 자칫 무언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까 봐 문득 겁이 나곤 합니다. 늘 지켜 주시고 깨우쳐 주셔야겠습니다.”(5월 14일)라고 기도하고, 밤사이 사망해 비어 있는 병상을 보며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도자의 첫 걸음>
정식 수녀가 된 만큼 수도자로서 영성을 가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가난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아침 묵상 시간에 번번이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때려 주고 싶도록 밉기도 합니다.”(4월 29일)
“오늘처럼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고해성사로 마음도 세탁해서 하얗게 안으로 다림질해 놓은 날에는 살아 있다는 것의 행복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5월 1일)
“어느 땐 남에게 숫제 아무 말도 하기 싫은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그저 누구에게라도 불안한 마음을 터뜨려 그의 동의를 구하고 싶은, 극히 고상하지 못한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5월 11일)
그러다가 문득 “물론 어려운 길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힘이 듭니다.”(5월 17일)라고 절망감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출발할 때의 설레는 느낌과 늘 깨어 있으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5월 23일)라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입니다.
“하루라는 작은 배에 매일매일 항해의 돛을 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항상 ‘이것이 처음이다.’하는 흥분과 긴장감을 가지고 서서히, 조심스럽게 항해의 모험을 계속해야 합니다.”(6월 1일)
“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축복받은 일입니까. 어서 제 등불의 심지를 돋우어야 하겠습니다.”(6월 11일)라며 다시 마음을 다잡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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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시와 기도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 쓰는 것이 보다 더 잘 기도할 수 있는 일임을 의심치 않습니다.”(6월 12일) 즉,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것이죠. 그런데 수도자 생활처럼 시 창작도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치 하느님께 응석 부리듯 이렇게도 적었네요. “5월에는 적어도 몇 편의 시를 쓰게 해 주시기를 빌고 싶습니다. 부탁이에요. 네?”(4월 30일)
수시로 “제게도 몇 줄의 맑은 시를 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투명하고 소박한 마음을.”(5월 2일) “‘반지’라는 시를 구상하고 있지만, 좀처럼 끝을 낼 수 없습니다.”(5월 21일) “오늘은 시 몇 편의 구상이 떠올라 여간 기쁜 게 아닙니다.”(7월 16일) “써야 할 텐데, 쓰고 싶은데... 그러다가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마나 봅니다.”(8월 25일)
그러다가 7월엔 ‘민들레의 영토’가 재판을 찍게 된 소식을 듣고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민들레의 영토’를 다시 찍는다는 소식은 무척도 저를 기쁘게, 또 얼마쯤은 당황하게도 만들어 줍니다.”(7월 9일)
<단체 생활의 어려움>
수녀원은 단체 생활을 하는 공간입니다. 수녀원 밖에서는 잘 모르는 엄격한 규율이 있지요. 또 단체 생활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어쩔 수가 없지요. 초보 수녀에겐 적응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기장엔 당시 감정이 솔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평화로운 매일을 갖는 게 소원입니다.”(5월 13일)
“누구와 마음을 터놓고 진정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습니다.”(5월 15일)
자신에 대한 ‘뒷담화’를 전해 들었을 때의 감정도 적었습니다.
“오늘 F수녀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자매가 제게 불만스러워 하는 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행동이 너무 느리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던 모양인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일을 민첩하게 척척 해내지 못하는 데다 언제나 생각에 깊이 잠겨 현재를 잊어버리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6월 9일)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생전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인 양 자만에 빠져 사는 게 또한 인간인가 봅니다.”(6월 22일)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며 그들이 저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다른 자매들이 원하는 것을 이왕이면 더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고 싶지만 때로는 잘되지 않습니다.”(8월 23일)
어떻습니까. 정말 솔직하지요?
<수도 영성 생활>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초보 수녀는 차츰 영적으로 성숙해 갑니다.
“요즘은 저의 기도가 너무나 기계적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특별히 분심을 하는 것도 아닌데, 또 졸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멍청히 기도 시간을 보내는 상태입니다.”(7월 28일)
예수가 물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한 일을 예로 들면서 “오, 주님. 아직도 저는 깊은 데로 가기를 꺼려 하고 있습니다.”(9월 2일)라고 고백합니다.
또 “주님, 제발 저 자신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좀 더 가난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9월 4일)라고 호소하고, “식탁에서 과일이나 그 밖의 것들을 선택할 때에도 자기 밑에 앉은 다른 이들을 위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골라 가지는 일 또한, 실은 간단한 것 같지만 얼마나 자주 무심히 넘어가는 일입니까.”(9월 11일)라고 자기반성을 합니다.
“포도를 따 먹은 손에서는 아직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옵니다. 익어서 더욱 아름답고,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열매와 같이 저도 당신 안에서 익어 가는 영혼이 되게 하소서.”(9월 25일) “제가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오직 당신 안에서만 호흡할 수 있는 사랑의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0월 4일)라고 기도합니다.
이제 막 정식 수녀가 됐지만 항상 초심을 되새기며 나태와 교만을 경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의 이 검은 수도복이 실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벗기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 수도복을 입지 않은 이들보다 더 열심히 한 것도 없고, 더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면서 ‘수녀’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대우에 익숙해져서 때로는 정말 무엇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 언제나 제가 아직 수도복을 받지 못했을 때의 그 배고픔과 갈망과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1월 5일)
“진정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구태여 남이 알아주는 큰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만 민들레가 되고 싶다 해 놓고도 장미의 화려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필요 이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제 은밀한 교만이 늘 부끄러울 뿐입니다.”(12월 3일) 같은 고백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장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일기는 연말을 향해 가면서 사랑과 기쁨이 차오릅니다.
“주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당신 안에 모여 하나로 사는 이 생활만큼 분에 넘치는 행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12월 12일)
“주님, 장미의 길을 원했던 베르나데트(세례명)였으나, 이제는 민들레의 길만을 원하는 클라우디아(수도자명)를 앞으로도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12월 31일)
<노년의 삶>
책에는 부록으로 2025년의 일기도 몇 편 실렸습니다. 50년 전 일기가 새로운 수도 생활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가득하다면 작년의 일기엔 노년의 여유와 관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노년을 산다는 것은 끝없는 인내를 실습하는 것. 하루하루가 모험의 연속이네. 육체에 대한 걱정, 관계에서 오는 긴장, 때때로 엄습하는 마음 속 두려움까지 견디어 내야 하는 시기. 그래도 웃어야지. 아직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지. 새롭게 되뇌면서. ‘또 한 번 눈을 뜨고 살아 있구나.’ ‘또 하루를 버티어 내어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드는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2025년 4월 14일)
갑작스러운 동료의 투병과 죽음, 기억을 잃어가는 원로 수녀를 보면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친지들이 찾아와 자갈치 시장을 방문하면 시장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정신을 번쩍 차리곤 한답니다.
이해인 수녀는 지난주 전화 통화에서 “이미 책을 읽은 분들이 손편지를 보내 온다”고 했습니다. ‘최근 심적으로 고민되는 일이 있었는데, 수녀님은 주님만 사랑하시니 나와 같은 고민이 없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도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란 이런 것인 모양입니다. 이제는 원로가 된 한 수도자의 젊은 시절 내면의 자화상 같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