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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와송당’에서 태어나다
조선 중종 시기, 21살에 장원급제한 남도 출신 신동(神童)이 있었다. 그는 담양부사 박상(朴祥, 1474-1530), 순창군수 김정(金淨, 1486-1521)과 함께 순창 삼인대에서 ‘신비복위소’를 작성, 인륜의 대의를 실천한다.
‘중종실록’ 13년(1518) 7월22일자에 사관은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해 글 잘하고 활 잘 쏘니 참으로 호걸이었다. 지기(志氣)가 곧아서 그가 사헌부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잘생긴 외모에다, 글 잘하고 바다이야기 불의를 참지 못했으며 거기에 활까지 잘 쏘는, 즉 문·무를 겸비한 기남자가 창평 출신의 석헌 류옥(柳沃, 1487-1519)이다.
류옥 영정
류옥 백경게임 은 청빈하기까지 했다. 그가 33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참찬관 윤자임은 “류옥이 가난해 장사를 치를 수 없으니 참으로 애석하다”며 임금에게 은전을 베풀어 달라고 건의했고, 중종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부의를 보내고 초상 치르는 일을 주관하게 했다.
류옥은 1487년(성종 18) 창평현 유곡리(현 해곡리 얼그실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에서 순창 훈도를 지낸 류문표와 성주 현씨 사이에 태어난다. 자는 계언(季彦), 호는 석헌(石軒), 시호는 정간(靖簡), 본관은 문화(文化, 황해도 신천)이다.
류옥의 조부는 성균관 생원 류인흡으로 사육신 류성원과는 6촌간이었다. 인흡은 육신의 화(六臣禍)를 면하기 위해 서울에서 전북 순창으로 숨어들었고, 부친이 창평의 성주 현씨 댁에 릴게임몰메가 장가들면서 얼그실 마을에 터를 잡게 된다. 류옥이 창평 얼그실에서 태어난 연유다. 이후 창평 얼그실은 문화류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된다.
류옥이 태어난 종가의 당호가 ‘와송당’(臥松堂)이다. 문화류씨 종갓집 이름이 된 ‘와송당’은 “울창한 거송이 누워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그늘이 땅에 가득하였다”해 붙여 바다이야기하는법 진 이름이었다.
사랑채에 걸린 당호 ‘와송당’
와송당은 세분의 현인이 나올 명당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했다. 실제 와송당에서는 류옥이 태어난 지 95년 뒤에 정철의 아들로 대제학에 오른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이 태어난다.
정철이 류옥의 아들 류강항의 딸과 혼인했으니 와송당은 정철의 처가였고, 정홍명의 외가였다. 와송당에서는 한 분의 현인이 더 태어난다. 류옥의 후손으로 전주 판관을 지낸 수초당 류현(柳俔)이 그다.
와송당의 ‘와송’은 수령 500년을 채운 뒤 1919년 말라 죽고 말았지만, 와송으로 인해 생겨난 사랑채의 당호 와송당이 있는 종가는 오늘 ‘유종헌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 21살의 나이에 장원급제하다 21살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한 류옥은 떡잎부터 남달랐다. 4·5살 때 문자를 읽었고, 9살에는 ‘광한전부’(廣寒殿賦)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4살 때 일이다. 옥과 현감이던 최형한이 관아 동쪽에 ‘영귀정’(詠歸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낙성식 무렵에 류옥의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정기(亭記)를 요청한다. 류옥은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고 지어서 쓰니, 문사(文詞)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호방하고 양양하여 뭇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영귀정기’는 곧바로 판각돼 걸린다.
류옥은 15살이던 1501년(연산군 7), 과거 1차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한 후, 21살이던 1507년(중종 2) 식년시에 장원급제한다. 21살 장원급제는 당대의 사건이었다. 남도인으로 장원급제를 한 고경명은 26살, 류옥의 손녀사위였던 정철은 27살, 동인의 거두였던 이발은 30살, 삼정승을 다 거친 박순은 31살에야 장원급제한다. 21살 류옥의 장원급제가 유독 빛나는 이유다.
장원급제했으니, 류옥의 미래는 전도양양했다. 급제 다음 해인 1508년(중종 3), 정6품 경연청 검토관이 된다. 당시 장원 급제자(갑과 제1위)가 받았던 관직의 품계는 정6품으로, 을과 및 병과로 합격했던 동료들이 받았던 7-9품에 비하면 대단한 혜택이었다.
이듬해인 1509년, 그는 정6품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 등 요직을 거친다. 그리고 1510년, 어버이 봉양을 위해 무안 현감이 된다. 24살 젊은 청년 수령이었다. 그가 무안 현감 시절, 전라도 관찰사 임유겸이 지방 수령의 근무평점을 줄 때 류옥을 상·중·하 가운데 중등으로 고과 점수를 매기자, 사헌부가 이에 항의하기도했다는 ‘실록’ 기록도 있다.
1514년(중종 9년) 홍문관 수찬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후 정5품 사간원 헌납이 됐고, 1515년(중종 15)에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오른다. 동년, 어버이 봉양을 위해 또 무안 현감으로 나간다.
이때 류옥은 담양군수 박상,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순창 강천사 삼인대(三印臺)에서 ‘신비복위소’를 올린다.
무안 현감의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동년 10월, 또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신비복위소 사건과 연루돼 장령에서 물러난 후 1517년(중종 12) 다시 받은 관직이 정6품 함경북도 평사(병마절도사를 보좌하고 무신 수령들을 규찰하던 문관 관직)였다. 정4품에서 정6품으로 발령이 났으니, 좌천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논란이 일자, 잠시 사헌부 장령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부령부사, 고령첨사, 함경북도 우후, 종성부사에 임명된다. 주로 무인이 임명되던 관직에 문과 장원 급제자가 임명됐으니, 조정에서는 큰 논란이 인다.
종3품 부령 부사에 임명되자, 대간뿐만 아니라 3정승도 류옥의 부령 부사 임명은 문제가 있다며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
중종은 “북도의 수령은 거의 다 연소하여 거칠고 용맹한 무인으로서, 그 위엄을 세우고자 형벌을 엄혹하게 하는데, 류옥은 북방의 일을 익숙히 알고 있으니, 이제 만약 그곳에 있게 되면 무사의 무리들이 거의 두려워 할 것이니, 이는 대간을 존중한 뜻이 없지 아니하다”하고, 윤허하지 아니한다. 류옥이 문신이지만 북방의 일에 정통하니 적격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는 류옥을 내치기 위한 명분이었다. 당시 사관은 “류옥이 장령이 돼 말을 바르게 하고 덮어둠이 적으니, 시론(時論)이 굳세어서 상께서 특별히 부령 부사로 제수하셨는데…”라든가 그가 죽자, “그가(류옥) 사헌부에 들어가자,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는 사관의 평가에서 보듯, 바른말을 서슴지 않은 직언 때문이었다. 훈구세력이 싫어했음은 당연하다.
류옥의 후손인 류승이 쓴 ‘행장’(行狀)에 “종성부사로 나아감은 남곤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이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저간의 분위기가 전달된다. 당시 남곤은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낸 권력의 실세였다.
류옥도 부령·종성부사에의 임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는 사관이 쓴 졸기에 “마침내 부사에 임명되자 항상 울분하여 즐거워하지 않다가 부모를 뵈러 온 지 얼마 안 되어 죽으니, 사람들이 다 애석히 여겼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신비복위소’를 작성하다 신비복위소의 주인공 신씨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남편이 중종반정으로 왕(중종)이 됐지만, 남편이 왕이 됐기에 쫓겨나야 했던 인물이었다. 신씨는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공교롭게도 연산군의 부인 역시 신수근의 누이었다. 반정공신 박원종 등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신수근을 격살한다. 그리고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후환을 두려워한 박원종 등은 중종을 핍박해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쫓아낸다. 그리고 숙의 윤씨가 신비를 이어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가 된다.
1515년(중종 10) 중전 장경왕후 윤씨는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6일 만에 죽는다. 이때 구언(求言)이 있자, 무안 현감 류옥은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순창의 강천사 계곡에 모여 각각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고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상소의 대강은 3인이 의논했지만, 소장 작성은 문장이 뛰어난 최 연하였던 류옥의 몫이었다.
류옥이 작성한 신비복위소는 폐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줌과 동시에 복위시키고, 신씨의 폐위를 주장한 반정의 3대 공신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관직을 박탈하고 죄 주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요구였다.
조강지처를 내친 죄, 즉 인륜을 무너뜨린 죄가 조선 왕조를 안정시킨 반정의 공보다 더 크다는 것이, 박원종 등의 죄를 묻는 근거였다. 반정 공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당시 신비복위소는 목숨을 담보한 의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비복위소에는 류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 임금의 구언 교지에 의해 올린 상소였지만, 상소 내용이 중대했고 공신 측의 반발이 거세어 상소인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상과 김정은 “죄를 물어 죽는 것은 우리 모두 두렵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모두 부모님이 계시고, 만약에 화를 당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형제가 있어 부모님을 뫼실 수 있으되 석헌 류공(柳公, 류옥)만은 부모님을 봉양할 형제가 따로 없으니 홀로 남겨진 부모님께 큰 불효가 됨으로 상소에 연명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설득, 류옥의 서명이 빠진 채 두 사람만 서명해 올렸기 때문이다.
조정은 신비복위소로 인해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지만, 이 상소는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이어 일어난 기묘사화의 불씨가 된다.
류옥 등이 주청한 신비 복위가 영조 때 이뤄지면서, 단경왕후 신주는 중종의 종묘에 모셔졌는데, 세 명의 부인(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 첫 번째 자리(元后)에 놓이게 된다.
‘신비복위소’를 올린 장소에 건립된 ‘삼인대비’(순창군 강천사 앞)
류옥 묘소(담양군 대전면 비차리 25)
영조는 류옥 등의 상소를 ‘늠름한 행위였다’고 평가하고, 신비 복위가 이뤄진 5년 뒤인 1744년(영조 20), 신비복위소를 올렸던 순창 강천사 앞 냇가에 류옥 등 3인의 의로운 행위를 기록한 ‘삼인대비’를 세운다.
무덤 앞의 신도비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류옥은 사후인 1788년(정조 12)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되고,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에 증직됐으며, 1863년(철종 14)에는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리고 1913년 그의 무덤 앞에 신도비가 선다. 그가 태어난 ‘와송당’, 늠름한 행위를 기린 ‘삼인대비’와 함께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흔적들이다.
조선 중종 시기, 21살에 장원급제한 남도 출신 신동(神童)이 있었다. 그는 담양부사 박상(朴祥, 1474-1530), 순창군수 김정(金淨, 1486-1521)과 함께 순창 삼인대에서 ‘신비복위소’를 작성, 인륜의 대의를 실천한다.
‘중종실록’ 13년(1518) 7월22일자에 사관은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해 글 잘하고 활 잘 쏘니 참으로 호걸이었다. 지기(志氣)가 곧아서 그가 사헌부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잘생긴 외모에다, 글 잘하고 바다이야기 불의를 참지 못했으며 거기에 활까지 잘 쏘는, 즉 문·무를 겸비한 기남자가 창평 출신의 석헌 류옥(柳沃, 1487-1519)이다.
류옥 영정
류옥 백경게임 은 청빈하기까지 했다. 그가 33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참찬관 윤자임은 “류옥이 가난해 장사를 치를 수 없으니 참으로 애석하다”며 임금에게 은전을 베풀어 달라고 건의했고, 중종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부의를 보내고 초상 치르는 일을 주관하게 했다.
류옥은 1487년(성종 18) 창평현 유곡리(현 해곡리 얼그실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에서 순창 훈도를 지낸 류문표와 성주 현씨 사이에 태어난다. 자는 계언(季彦), 호는 석헌(石軒), 시호는 정간(靖簡), 본관은 문화(文化, 황해도 신천)이다.
류옥의 조부는 성균관 생원 류인흡으로 사육신 류성원과는 6촌간이었다. 인흡은 육신의 화(六臣禍)를 면하기 위해 서울에서 전북 순창으로 숨어들었고, 부친이 창평의 성주 현씨 댁에 릴게임몰메가 장가들면서 얼그실 마을에 터를 잡게 된다. 류옥이 창평 얼그실에서 태어난 연유다. 이후 창평 얼그실은 문화류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된다.
류옥이 태어난 종가의 당호가 ‘와송당’(臥松堂)이다. 문화류씨 종갓집 이름이 된 ‘와송당’은 “울창한 거송이 누워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그늘이 땅에 가득하였다”해 붙여 바다이야기하는법 진 이름이었다.
사랑채에 걸린 당호 ‘와송당’
와송당은 세분의 현인이 나올 명당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했다. 실제 와송당에서는 류옥이 태어난 지 95년 뒤에 정철의 아들로 대제학에 오른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이 태어난다.
정철이 류옥의 아들 류강항의 딸과 혼인했으니 와송당은 정철의 처가였고, 정홍명의 외가였다. 와송당에서는 한 분의 현인이 더 태어난다. 류옥의 후손으로 전주 판관을 지낸 수초당 류현(柳俔)이 그다.
와송당의 ‘와송’은 수령 500년을 채운 뒤 1919년 말라 죽고 말았지만, 와송으로 인해 생겨난 사랑채의 당호 와송당이 있는 종가는 오늘 ‘유종헌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 21살의 나이에 장원급제하다 21살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한 류옥은 떡잎부터 남달랐다. 4·5살 때 문자를 읽었고, 9살에는 ‘광한전부’(廣寒殿賦)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4살 때 일이다. 옥과 현감이던 최형한이 관아 동쪽에 ‘영귀정’(詠歸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낙성식 무렵에 류옥의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정기(亭記)를 요청한다. 류옥은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고 지어서 쓰니, 문사(文詞)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호방하고 양양하여 뭇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영귀정기’는 곧바로 판각돼 걸린다.
류옥은 15살이던 1501년(연산군 7), 과거 1차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한 후, 21살이던 1507년(중종 2) 식년시에 장원급제한다. 21살 장원급제는 당대의 사건이었다. 남도인으로 장원급제를 한 고경명은 26살, 류옥의 손녀사위였던 정철은 27살, 동인의 거두였던 이발은 30살, 삼정승을 다 거친 박순은 31살에야 장원급제한다. 21살 류옥의 장원급제가 유독 빛나는 이유다.
장원급제했으니, 류옥의 미래는 전도양양했다. 급제 다음 해인 1508년(중종 3), 정6품 경연청 검토관이 된다. 당시 장원 급제자(갑과 제1위)가 받았던 관직의 품계는 정6품으로, 을과 및 병과로 합격했던 동료들이 받았던 7-9품에 비하면 대단한 혜택이었다.
이듬해인 1509년, 그는 정6품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 등 요직을 거친다. 그리고 1510년, 어버이 봉양을 위해 무안 현감이 된다. 24살 젊은 청년 수령이었다. 그가 무안 현감 시절, 전라도 관찰사 임유겸이 지방 수령의 근무평점을 줄 때 류옥을 상·중·하 가운데 중등으로 고과 점수를 매기자, 사헌부가 이에 항의하기도했다는 ‘실록’ 기록도 있다.
1514년(중종 9년) 홍문관 수찬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후 정5품 사간원 헌납이 됐고, 1515년(중종 15)에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오른다. 동년, 어버이 봉양을 위해 또 무안 현감으로 나간다.
이때 류옥은 담양군수 박상,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순창 강천사 삼인대(三印臺)에서 ‘신비복위소’를 올린다.
무안 현감의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동년 10월, 또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신비복위소 사건과 연루돼 장령에서 물러난 후 1517년(중종 12) 다시 받은 관직이 정6품 함경북도 평사(병마절도사를 보좌하고 무신 수령들을 규찰하던 문관 관직)였다. 정4품에서 정6품으로 발령이 났으니, 좌천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논란이 일자, 잠시 사헌부 장령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부령부사, 고령첨사, 함경북도 우후, 종성부사에 임명된다. 주로 무인이 임명되던 관직에 문과 장원 급제자가 임명됐으니, 조정에서는 큰 논란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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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북도의 수령은 거의 다 연소하여 거칠고 용맹한 무인으로서, 그 위엄을 세우고자 형벌을 엄혹하게 하는데, 류옥은 북방의 일을 익숙히 알고 있으니, 이제 만약 그곳에 있게 되면 무사의 무리들이 거의 두려워 할 것이니, 이는 대간을 존중한 뜻이 없지 아니하다”하고, 윤허하지 아니한다. 류옥이 문신이지만 북방의 일에 정통하니 적격자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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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복위소’를 작성하다 신비복위소의 주인공 신씨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남편이 중종반정으로 왕(중종)이 됐지만, 남편이 왕이 됐기에 쫓겨나야 했던 인물이었다. 신씨는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공교롭게도 연산군의 부인 역시 신수근의 누이었다. 반정공신 박원종 등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신수근을 격살한다. 그리고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후환을 두려워한 박원종 등은 중종을 핍박해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쫓아낸다. 그리고 숙의 윤씨가 신비를 이어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가 된다.
1515년(중종 10) 중전 장경왕후 윤씨는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6일 만에 죽는다. 이때 구언(求言)이 있자, 무안 현감 류옥은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순창의 강천사 계곡에 모여 각각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고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상소의 대강은 3인이 의논했지만, 소장 작성은 문장이 뛰어난 최 연하였던 류옥의 몫이었다.
류옥이 작성한 신비복위소는 폐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줌과 동시에 복위시키고, 신씨의 폐위를 주장한 반정의 3대 공신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관직을 박탈하고 죄 주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요구였다.
조강지처를 내친 죄, 즉 인륜을 무너뜨린 죄가 조선 왕조를 안정시킨 반정의 공보다 더 크다는 것이, 박원종 등의 죄를 묻는 근거였다. 반정 공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당시 신비복위소는 목숨을 담보한 의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비복위소에는 류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 임금의 구언 교지에 의해 올린 상소였지만, 상소 내용이 중대했고 공신 측의 반발이 거세어 상소인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상과 김정은 “죄를 물어 죽는 것은 우리 모두 두렵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모두 부모님이 계시고, 만약에 화를 당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형제가 있어 부모님을 뫼실 수 있으되 석헌 류공(柳公, 류옥)만은 부모님을 봉양할 형제가 따로 없으니 홀로 남겨진 부모님께 큰 불효가 됨으로 상소에 연명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설득, 류옥의 서명이 빠진 채 두 사람만 서명해 올렸기 때문이다.
조정은 신비복위소로 인해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지만, 이 상소는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이어 일어난 기묘사화의 불씨가 된다.
류옥 등이 주청한 신비 복위가 영조 때 이뤄지면서, 단경왕후 신주는 중종의 종묘에 모셔졌는데, 세 명의 부인(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 첫 번째 자리(元后)에 놓이게 된다.
‘신비복위소’를 올린 장소에 건립된 ‘삼인대비’(순창군 강천사 앞)
류옥 묘소(담양군 대전면 비차리 25)
영조는 류옥 등의 상소를 ‘늠름한 행위였다’고 평가하고, 신비 복위가 이뤄진 5년 뒤인 1744년(영조 20), 신비복위소를 올렸던 순창 강천사 앞 냇가에 류옥 등 3인의 의로운 행위를 기록한 ‘삼인대비’를 세운다.
무덤 앞의 신도비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류옥은 사후인 1788년(정조 12)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되고,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에 증직됐으며, 1863년(철종 14)에는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리고 1913년 그의 무덤 앞에 신도비가 선다. 그가 태어난 ‘와송당’, 늠름한 행위를 기린 ‘삼인대비’와 함께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흔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