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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인자한 성품, 실용적인 인재관
세종의 인격에 대해 당대의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요순은 곧 성군의 대명사인데, ‘해동요순’이라는 표현은 왕에겐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을 제외하곤 세종시대엔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반역 사건이 하나도 없었고, 대역 사건으로 참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세종이 성군의 면모를 갖춘 배경에는 그의 타고난 천성과 갈고 닦은 인품이 있었다. 세종은 함부로 사람을 몰아치거나 궁지로 내모는 태종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천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인정이 많고 너그러웠으며, 웬만한 일로 화를 내지 않으며, 화를 낸 뒤에도 그것으로 릴게임방법 앙갚음을 하지 않는 성정을 가졌다. 또한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고 배려함으로써 함부로 기를 누르거나 의기소침하게 만들지 않았다.
특히 세종은 능력 있는 인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이와 관련하여 성현의 ‘용재총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김하는 중국어 번역을 잘하므로 세종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가 판 골드몽 사로 있을 때에 녹명아란 여인과 가깝게 지냈다. 종친 한 사람과 도승지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종친은 자신이 먼저 사귄 여성에게 김하가 접근했다고 불쾌해했다. 그러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종친을 타일렀다.
“그대 같은 사람은 나라로 보아 있으나 마나 하다. 김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명나라와의 외교를 위해서는 이 사람이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꼭 필요하다. 또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그 여인을 첩으로 삼게 하라. 만약 이 일로 다툰다면 죄를 물을 것이다.”
세종은 대단하지 않은 재주라도 아끼고 장려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세종의 인재 사랑은 때론 신분을 초월하기도 했다. 세종은 관노 장영실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주고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 바다이야기게임기 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조정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장영실은 재주만 정교하고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명민하기가 보통이 넘는다.”
그러면서 세종은 장영실에게 정4품 호군 벼슬을 내렸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고 총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단 인재를 뽑으면, 그의 능력에 맞는 곳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가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세종 재위 이전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세종에게 발탁된 이후부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 천문학의 대가 이순지, 조선 음악의 거장 박연, 육진 개척의 주역 김종서, 세종 정치의 주춧돌이 된 황희와 맹사성, 과학 혁명의 초석을 다진 정초 등 수많은 인재들이 세종에 의해 빛을 발했다.
세종은 벼슬을 내릴 때는 철저히 능력 위주로 등용하였고, 비록 도덕적인 흠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대표적으로 황희 같은 인물은 뇌물과 청탁 문제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고, 심지어 살인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도 했지만 그의 뛰어난 정무 처리 능력과 탁월한 대인관계를 높이 평가하여 20년이 넘도록 정승 자리에 머물게 했다. 또 허조 같은 인물은 예와 법에 밝긴 했으나 지나치게 꼬장꼬장하고 융통성이 별로 없어 세종과 의견이 부딪치는 일도 많았으나 끝까지 곁에 두었으며, 고약해(고약하다의 어원이 되는 인물이라는 설이 있음) 같은 인물은 말버릇이 없고 행동에 절제가 없어 임금에게 함부로 덤비는 일도 있었으나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끝까지 등용하여 부렸다.
세종시대의 정치, 외교, 국방, 문화, 과학, 교육 등 다방면에서의 성공은 바로 이런 실용적인 인재관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깐깐한 남편
세종은 왕으로서는 성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렇다면 남편으로서의 세종은 어땠을까?
세종은 한 명의 왕비와 12명의 후궁을 뒀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12세에 결혼한 두 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종이 충녕군 시절에 결혼했으므로 군부인이 되었다가 후에 세자빈을 거쳐 왕비에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가 된 이후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다. 시아버지 태종이 친정아버지 심온을 죽이고,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두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세종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도 장인의 신분을 복권시키지 않았고, 처가 사람들을 천인 신분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바꿔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소헌왕후는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여느 남편이었다면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장인을 복권시킬만 했건만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은 뒤에도 처가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심온의 복권은 문종에 의해 이뤄졌다.) 그렇다고 아내 심씨를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온 조강지처인 그녀에 대해 매우 자상했지만, 아버지가 결정한 일을 아들이 뒤엎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은 그것이 효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남편이 효자면 아내가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 세종이 딱 그 짝이었다.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음에도 세종은 전혀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깐깐한 면모는 12명의 후궁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사견문록’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는 세종이 후궁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보여준다.
한 어린 궁녀가 사랑 받음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 되어 항상 좌우에 뫼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아녀자가 감히 청탁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나면 어떠할 것인가를 가히 짐작하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물리쳐 멀리하니, 다시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작가
■ 용어 설명 - 공사견문록 (公私見聞錄)
조선후기에 정재륜이 쓴 역사책으로 자신이 궁궐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전한다. 정재륜은 효종의 다섯째 딸인 숙정 공주의 남편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래서 궁궐에서 자신이 직접 들은 내용을 이 책에 수록했는데, 모두 4권 4책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 소개된 내용은 1권의 ‘공사견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 인자한 성품, 실용적인 인재관
세종의 인격에 대해 당대의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요순은 곧 성군의 대명사인데, ‘해동요순’이라는 표현은 왕에겐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을 제외하곤 세종시대엔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반역 사건이 하나도 없었고, 대역 사건으로 참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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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세종은 능력 있는 인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이와 관련하여 성현의 ‘용재총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김하는 중국어 번역을 잘하므로 세종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가 판 골드몽 사로 있을 때에 녹명아란 여인과 가깝게 지냈다. 종친 한 사람과 도승지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종친은 자신이 먼저 사귄 여성에게 김하가 접근했다고 불쾌해했다. 그러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종친을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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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 사랑은 때론 신분을 초월하기도 했다. 세종은 관노 장영실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주고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 바다이야기게임기 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조정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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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세종은 장영실에게 정4품 호군 벼슬을 내렸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고 총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단 인재를 뽑으면, 그의 능력에 맞는 곳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가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세종 재위 이전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세종에게 발탁된 이후부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 천문학의 대가 이순지, 조선 음악의 거장 박연, 육진 개척의 주역 김종서, 세종 정치의 주춧돌이 된 황희와 맹사성, 과학 혁명의 초석을 다진 정초 등 수많은 인재들이 세종에 의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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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의 정치, 외교, 국방, 문화, 과학, 교육 등 다방면에서의 성공은 바로 이런 실용적인 인재관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깐깐한 남편
세종은 왕으로서는 성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렇다면 남편으로서의 세종은 어땠을까?
세종은 한 명의 왕비와 12명의 후궁을 뒀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12세에 결혼한 두 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종이 충녕군 시절에 결혼했으므로 군부인이 되었다가 후에 세자빈을 거쳐 왕비에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가 된 이후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다. 시아버지 태종이 친정아버지 심온을 죽이고,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두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세종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도 장인의 신분을 복권시키지 않았고, 처가 사람들을 천인 신분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바꿔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소헌왕후는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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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린 궁녀가 사랑 받음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 되어 항상 좌우에 뫼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아녀자가 감히 청탁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나면 어떠할 것인가를 가히 짐작하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물리쳐 멀리하니, 다시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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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 설명 - 공사견문록 (公私見聞錄)
조선후기에 정재륜이 쓴 역사책으로 자신이 궁궐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전한다. 정재륜은 효종의 다섯째 딸인 숙정 공주의 남편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래서 궁궐에서 자신이 직접 들은 내용을 이 책에 수록했는데, 모두 4권 4책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 소개된 내용은 1권의 ‘공사견문’에 나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