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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보 목사의 강단 발언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목회자의 정치 참여와 정교분리에 관해, 고신애국지도자연합(고애연)과 고신을사랑하는성도들의모임(고사모)간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사모는 손 목사가 자극적인 구호와 선동으로 강단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반면 고애연은 손현보 목사 현상을 비판하는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비난을 이어 가고 있으며, 선지자적 기능을 외면한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번 토론이 손 목사 현상과 정교분리 문제를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최근 고사모 이용우 장로 온라인야마토게임 는 3월 7일 <뉴스앤조이>에 실린 필자의 글을 비판하면서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정치적 선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장로의 글은 개혁주의 신학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신학적 논증이라기보다 정치적 평가와 정서적 규정에 더 가깝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한 설교자의 발언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개혁주의 설 바다이야기부활 교의 본질, 강단의 공적 책임,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을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적 언어가 아니라 성경과 신앙고백이라는 기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사모의 글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견 신학 비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무런 신학적 입증 없이 정치적 혐오감과 인상 비 바다이야기오리지널 평을 교리 판단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고사모 측의 7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중심으로 그의 글을 재반박하고자 합니다.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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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신학적 반박'이 아니라 '논점 바꿔치기'를 하고 있다
고사모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필자가 제기한 본래의 질문에 전혀 답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고사모에게 물은 것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가 어떤 본 체리마스터모바일 문을 어떻게 왜곡하였으며, 어떤 교리를 부정하였고, 어느 신앙고백 조항과 충돌하는가였습니다.
그런데 고사모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문제를 슬그머니 "정치 선동이냐 아니냐"는 프레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반박이 아니고 논쟁의 쟁점을 피해 다른 싸움판으로 옮겨 가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법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논쟁은 상대의 핵심 명제를 직접 반박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사모는 '설교의 타락이라는 판정은 무엇으로 입증되는가'라는 필자의 핵심 문제 제기를 외면한 채, 자신이 유리한 정치적 인상 비평의 장으로 문제를 끌고 갔습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시작부터 이미 정면 반박에 실패한 글입니다.
'타락'과 '탈선'을 말하면서도 정작 교리적으로는 하나도 입증하지 못한다
고사모는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향해 "탈선", "정치 선동", "복음의 자리를 찬탈"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어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매우 무거운 판정어입니다. 이런 판정을 하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본문 주해, 문맥 분석, 구속사적 검토, 교리적 일탈의 특정, 신앙고백서와의 충돌 명시 등입니다.
그런데 고사모의 글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고사모는 "성경을 동원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변했다", "예배를 오염시켰다"고 말하지만, 어느 설교의 어떤 문장이, 어떤 주해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었다는 것인지를 전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고사모의 두 번째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개혁주의는 느낌으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과 교리와 고백서로 판단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0항의 정신에 따르면, 모든 신학 논쟁의 최종 판단은 성경 그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사모의 글은 성경 본문에 의한 판정이 아니라 정치적 불쾌감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타락'이라는 판정어를 사용했지만, 그 판정을 감당할 신학적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고사모의 반박문은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적 설교'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봉쇄하고 있다
고사모 글의 또 하나의 구조적 모순은 설교자의 선지자적 기능을 원론적으로는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무력화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개혁주의가 사회와 정치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정치 참여는 가능하다",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어떤 설교자가 공적 악, 정책, 권력의 문제를 강하게 다루면 그는 곧바로 그것을 정치 선동, 혐오, 정파 대변, 교회 오염으로 규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원칙적으로는 선지자적 기능을 인정하되, 실제 발동되면 곧바로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구조적으로 모순이며, 성경의 선지자 전통과도 충돌합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모두 당대의 공적 불의를 향해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 나단은 왕을 책망했습니다- 엘리야는 국가 권력과 우상 체제를 정면으로 대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통치자의 불법한 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사도들은 공권력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죄를 꾸짖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IV. 12)며 사회적 악과 공적 부패를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만약 고사모가 이 전통을 인정한다면, 공적 적용이 포함된 설교 그 자체를 정치 선동으로 몰아가는 태도는 선지자적 직무에 대한 부정이며, 성경에 대한 사실상의 부정입니다. 따라서 고사모의 글은 단순하게 선지자적 사명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선지자적 사명의 작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 위험한 글입니다.
정교분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단 침묵론'을 주장한다
고사모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면서, 손현보 목사의 공적 발언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실상 그가 원하는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강단의 비정치화, 더 정확히 말하면 강단의 침묵화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정교분리관과 다릅니다.
개혁주의에서 정교분리는 "국가가 교회의 영적 사역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교회가 공적 문제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의 핵심은 국가와 교회의 직무 구별이지, 진리 선포의 금지가 아닙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공의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듯이 교회는 말씀으로 국가를 향해 선악을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합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왕들과 통치자들 위에도 군림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강단의 공적 발언을 문제 삼는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강단 침묵론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공적 영역의 죄와 악을 강단에서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정교분리 위반처럼 몰아가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자유주의적 사사화(privatization) 프레임입니다. 즉 고사모의 논리는 "교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말라"는 개혁주의 원리를 "교회는 공적 문제를 말하지 말라"는 세속주의 명령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교분리의 설명이 아니라 정교분리의 왜곡입니다.
'혐오'라는 애매한 낙인으로 신학적 검증을 대체한다
고사모의 글에는 "혐오", "증오", "배척", "편 가르기"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고사모는 끝내 신학적으로 무엇이 혐오이며, 그리고 어떤 신학적 기준으로 그것이 혐오인지, 성경의 엄중한 책망과 혐오는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사모의 글은 신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향해 매우 강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 예수님은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권력자들과 백성의 죄악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강한 도덕적·언약적 언어 자체가 곧 혐오는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향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따라서 어떤 설교가 혐오인지 아닌지는 단순히 듣는 사람이 불쾌했는가 아닌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혐오의 신학적 판단 기준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의 선포인가, 아니면 성경의 이름을 빌린 사적 모욕인가입니다.
고사모는 이러한 구별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채, 개인의 불쾌감을 곧바로 신학적 판정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신학적 분별력의 결여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는 '내가 불편하게 느낀다'는 정서적 반응을 '신학적 혐오 판정'으로 격상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윤리가 아니라 도덕 감정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일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공공성'을 축소시킨다
고사모는 손현보 목사가 교회를 정치화하여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결국은 복음의 공공성을 축소하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교회가 특정 정당의 하부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당연히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공적 사안에 대한 설교적 적용까지 차단하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복음은 사적 위로만이 아니라, 왕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선언이며, 그 통치는 개인의 심령뿐 아니라 가정, 사회, 법, 국가, 정치, 문화 등 우리 삶의 전 영역에까지 미칩니다. 칼빈도, 개혁파 정통주의도, 바빙크도 복음을 단지 내면의 종교 감정으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사모의 글은 실상 "교회의 일치를 위해 공적 적용을 자제하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복음을 개인 구원, 정서적 위로, 비정치적 도덕성 정도로 축소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공적 악을 말하지 않는 일치는 참된 일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때때로 거짓 평화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꾸짖은 평화가 바로 그 평화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러므로 고사모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공공성과 예언자적 사명을 축소시켜 유지하는 침묵의 평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론이 아니라, 안전한 종교를 원하는 세속 시민사회의 기대에 더 가깝습니다.
'손현보 목사 신학적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편한 강단' 제거 시도일 뿐이다
고사모 글의 마지막 치명적 약점은 바로 여기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사모의 글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가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에 어긋나는지를 밝히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글 전체는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해 수렴하고 있습니다. 곧 정치적으로 거슬리고 불편한 강단, 그리고 자신들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설교를 '위험하다', '혐오다', '타락이다'라고 명명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의 이름을 빌린 검열의 욕망일 뿐입니다.
정말 개혁주의적으로 손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고 싶다면, 본문을 제시하고, 설교 내용을 인용하며, 주해의 오류를 밝히고, 신앙고백서의 위반을 특정하며,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절차를 논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사모는 이런 과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어렵고, 냉정하며, 증명이 필요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고사모는 더 쉬운 길, 다시 말하면 "정치 선동", "혐오", "이데올로기", "현대판 우상숭배" 등의 용어를 택했습니다. 이런 말들을 반복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도덕적 분노를 선동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필자의 글이나 손현보 목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역으로, 누가 신학을 하고 있고 누가 감정 정치를 하고 있는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결국 고사모의 글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무너뜨리는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학적 증명 없이 정치적 낙인에 기대고 있음을 폭로한 글입니다.
정리하면, 고사모의 글은 겉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혁주의 논쟁의 기본 절차를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고사모는 설교의 타락을 말하면서도 본문 왜곡을 입증하지 못했고, 선지자적 사명을 말하면서도 실제 강단의 공적 적용은 봉쇄했으며, 정교분리를 말하면서도 사실상 강단 침묵론을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혐오'와 '정치 선동'이라는 애매한 낙인 언어로 신학적 검증을 대체함으로써, 성경과 고백서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불편함을 신학적 판정처럼 포장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고사모의 글은 개혁주의적 재반박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을 신학의 언어로 포장한 감정적 선언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사모 측에 한 가지 정중한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관한 논의는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습니다. 비판이나 반론을 제기하려면 가능한 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연구 및 신학적 근거 위에서 논의를 이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토론이라면 저 역시 기꺼이 성실하게 답하며, 공교회와 신학의 유익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에 언제든지 참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논쟁은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사모가 계속해서 손 목사의 설교를 비난할 필요와 사명감을 갖는다면 구체적인 내용과 정확한 논리로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한식 /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
김한식 newsnjoy@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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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은 단순히 한 설교자의 발언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개혁주의 설 바다이야기부활 교의 본질, 강단의 공적 책임,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을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적 언어가 아니라 성경과 신앙고백이라는 기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사모의 글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견 신학 비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무런 신학적 입증 없이 정치적 혐오감과 인상 비 바다이야기오리지널 평을 교리 판단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고사모 측의 7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중심으로 그의 글을 재반박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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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사모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문제를 슬그머니 "정치 선동이냐 아니냐"는 프레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반박이 아니고 논쟁의 쟁점을 피해 다른 싸움판으로 옮겨 가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법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논쟁은 상대의 핵심 명제를 직접 반박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사모는 '설교의 타락이라는 판정은 무엇으로 입증되는가'라는 필자의 핵심 문제 제기를 외면한 채, 자신이 유리한 정치적 인상 비평의 장으로 문제를 끌고 갔습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시작부터 이미 정면 반박에 실패한 글입니다.
'타락'과 '탈선'을 말하면서도 정작 교리적으로는 하나도 입증하지 못한다
고사모는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향해 "탈선", "정치 선동", "복음의 자리를 찬탈"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어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매우 무거운 판정어입니다. 이런 판정을 하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본문 주해, 문맥 분석, 구속사적 검토, 교리적 일탈의 특정, 신앙고백서와의 충돌 명시 등입니다.
그런데 고사모의 글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고사모는 "성경을 동원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변했다", "예배를 오염시켰다"고 말하지만, 어느 설교의 어떤 문장이, 어떤 주해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었다는 것인지를 전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고사모의 두 번째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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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그는 '타락'이라는 판정어를 사용했지만, 그 판정을 감당할 신학적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고사모의 반박문은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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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모 글의 또 하나의 구조적 모순은 설교자의 선지자적 기능을 원론적으로는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무력화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개혁주의가 사회와 정치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정치 참여는 가능하다",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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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선지자들은 모두 당대의 공적 불의를 향해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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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단 침묵론'을 주장한다
고사모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면서, 손현보 목사의 공적 발언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실상 그가 원하는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강단의 비정치화, 더 정확히 말하면 강단의 침묵화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정교분리관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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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목사가 공적 영역의 죄와 악을 강단에서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정교분리 위반처럼 몰아가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자유주의적 사사화(privatization) 프레임입니다. 즉 고사모의 논리는 "교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말라"는 개혁주의 원리를 "교회는 공적 문제를 말하지 말라"는 세속주의 명령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교분리의 설명이 아니라 정교분리의 왜곡입니다.
'혐오'라는 애매한 낙인으로 신학적 검증을 대체한다
고사모의 글에는 "혐오", "증오", "배척", "편 가르기"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고사모는 끝내 신학적으로 무엇이 혐오이며, 그리고 어떤 신학적 기준으로 그것이 혐오인지, 성경의 엄중한 책망과 혐오는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사모의 글은 신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향해 매우 강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 예수님은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권력자들과 백성의 죄악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강한 도덕적·언약적 언어 자체가 곧 혐오는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향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따라서 어떤 설교가 혐오인지 아닌지는 단순히 듣는 사람이 불쾌했는가 아닌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혐오의 신학적 판단 기준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의 선포인가, 아니면 성경의 이름을 빌린 사적 모욕인가입니다.
고사모는 이러한 구별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채, 개인의 불쾌감을 곧바로 신학적 판정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신학적 분별력의 결여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는 '내가 불편하게 느낀다'는 정서적 반응을 '신학적 혐오 판정'으로 격상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윤리가 아니라 도덕 감정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일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공공성'을 축소시킨다
고사모는 손현보 목사가 교회를 정치화하여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결국은 복음의 공공성을 축소하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교회가 특정 정당의 하부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당연히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공적 사안에 대한 설교적 적용까지 차단하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복음은 사적 위로만이 아니라, 왕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선언이며, 그 통치는 개인의 심령뿐 아니라 가정, 사회, 법, 국가, 정치, 문화 등 우리 삶의 전 영역에까지 미칩니다. 칼빈도, 개혁파 정통주의도, 바빙크도 복음을 단지 내면의 종교 감정으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사모의 글은 실상 "교회의 일치를 위해 공적 적용을 자제하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복음을 개인 구원, 정서적 위로, 비정치적 도덕성 정도로 축소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공적 악을 말하지 않는 일치는 참된 일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때때로 거짓 평화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꾸짖은 평화가 바로 그 평화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러므로 고사모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공공성과 예언자적 사명을 축소시켜 유지하는 침묵의 평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론이 아니라, 안전한 종교를 원하는 세속 시민사회의 기대에 더 가깝습니다.
'손현보 목사 신학적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편한 강단' 제거 시도일 뿐이다
고사모 글의 마지막 치명적 약점은 바로 여기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사모의 글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가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에 어긋나는지를 밝히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글 전체는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해 수렴하고 있습니다. 곧 정치적으로 거슬리고 불편한 강단, 그리고 자신들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설교를 '위험하다', '혐오다', '타락이다'라고 명명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의 이름을 빌린 검열의 욕망일 뿐입니다.
정말 개혁주의적으로 손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고 싶다면, 본문을 제시하고, 설교 내용을 인용하며, 주해의 오류를 밝히고, 신앙고백서의 위반을 특정하며,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절차를 논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사모는 이런 과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어렵고, 냉정하며, 증명이 필요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고사모는 더 쉬운 길, 다시 말하면 "정치 선동", "혐오", "이데올로기", "현대판 우상숭배" 등의 용어를 택했습니다. 이런 말들을 반복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도덕적 분노를 선동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필자의 글이나 손현보 목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역으로, 누가 신학을 하고 있고 누가 감정 정치를 하고 있는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결국 고사모의 글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무너뜨리는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학적 증명 없이 정치적 낙인에 기대고 있음을 폭로한 글입니다.
정리하면, 고사모의 글은 겉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혁주의 논쟁의 기본 절차를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고사모는 설교의 타락을 말하면서도 본문 왜곡을 입증하지 못했고, 선지자적 사명을 말하면서도 실제 강단의 공적 적용은 봉쇄했으며, 정교분리를 말하면서도 사실상 강단 침묵론을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혐오'와 '정치 선동'이라는 애매한 낙인 언어로 신학적 검증을 대체함으로써, 성경과 고백서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불편함을 신학적 판정처럼 포장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고사모의 글은 개혁주의적 재반박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을 신학의 언어로 포장한 감정적 선언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사모 측에 한 가지 정중한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관한 논의는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습니다. 비판이나 반론을 제기하려면 가능한 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연구 및 신학적 근거 위에서 논의를 이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토론이라면 저 역시 기꺼이 성실하게 답하며, 공교회와 신학의 유익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에 언제든지 참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논쟁은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사모가 계속해서 손 목사의 설교를 비난할 필요와 사명감을 갖는다면 구체적인 내용과 정확한 논리로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한식 /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
김한식 newsnjoy@newsnjo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