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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자락 배화여고 교내 뒤편 작은 공터로 가면 넓은 바위가 있는데 ‘弼雲臺(필운대)’라는 크고 붉은 글씨가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구름을 돕는다’는 뜻인 ‘필운’은 ‘백사(白沙)’와 함께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1556~1618)의 호였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이곳으로 안내한 배승호(46) 원장이 말했다.
“백사의 옛 집터였던 이곳 필운대는 조선 시 앞으로 집값 대 봄이면 꽃놀이 명소였던 곳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도 있죠. ‘필운대’ 글씨는 백사가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오른쪽에 보이는 글씨는 그 9대손 이유원이 남긴 시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글씨의 역사적 유래를 거침없이 설명하는 배 원장의 ‘부캐(副캐릭터)’는 ‘바위 글씨 답사 전문가’, ‘본캐(본직업)’는 정형외과 의사다. 경기 부천에 인수 서 역곡서울성모정형외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근 전국 110여 지역 바위 글씨의 답사기와 그에 얽힌 역사를 쓴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푸른역사)를 출간했다.
6년 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 독립문 근처 병원에서 근무했던 것이 ‘부캐’ 활동의 계기였다. 수술하는 의사로서 매일 시험을 보듯 긴장의 연속이었고, 시간만 나면 머리를 중소기업진흥공단 식히며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만났어요. 스위스 대사관 맞은편 바위에는 ‘월암동(月巖洞)’이란 글씨가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사도세자의 궁녀가 의리를 지키며 살던 곳으로 정조가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하문터널 위쪽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글씨는 임시정부 고문이 된 김가진의 글씨였다.
외환은행 학자금대출 처음엔 사진을 촬영한 뒤 집에 와서 AI(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돌리고 글씨를 추출해 해석했지만, 점점 관심이 깊어지며 온갖 비석 글씨까지 조사하고 찾아가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바위에 남겨진 글씨를 접하기 위해서라면 바다 건너 제주도와 일본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즉석에서 글씨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한문 실력이 쑥쑥 늘었다. 페이스북에 실 연금복권 은 그의 답사기를 보고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이과 출신답게 사물을 끝까지 탐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치밀함이 보인다”는 평이 이어졌다.
험한 곳을 많이 다녔다. 제대로 길이 나지 않아 위태롭게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철조망 너머 간신히 사진을 촬영한 곳도 많았다. 제주도에선 바위 글씨 50여 곳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기이한 장소를 아슬아슬하게 답사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됐다. 사유지에 포함된 바위 글씨는 코로나 유행 시절 문을 열어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도 앱을 보고 민통선 지역을 가는데 군인이 막아서더니 “여기서부턴 지뢰 매설 지역입니다”라고 해 기겁한 적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런 이야기도 있었나’ 싶은 숨겨진 역사의 단면이 속속 드러났다. 재동의 ‘청린동천(靑麟洞天)’은 옛 계곡의 흔적이어서 놀랐는데, 명왕성 발견에 기여하고 고종의 사진을 처음 촬영한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도 갔던 곳이었다. 조선의 첫 세자였던 의안대군 방석의 무덤과 묘표는 남한산성 근처에 있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궁벽한 장소가 또 있을까’ 탄식할 만한 곳이었다. 두 가문이 묘지로 쓰는 산을 둘러싸고 수백 년 동안 분쟁을 벌인 현장이 있는가 하면, 지금으로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대주의적 정서를 드러낸 글씨도 있었다. 친일과 애국의 경계를 넘나든 여러 인물의 흔적 앞에선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미수 허목이나 추사 김정희의 명필과 만날 때는 아드레날린이 돌았다.
‘왜 바위 글씨를 답사하는가’란 질문에 배 원장은 “거기 새겨진 글씨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요즘의 간판이나 표지판과는 달리 매우 강한 공력(功力)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바위 글씨를 잘 읽어내면 우리가 오늘날 사는 이곳이 이렇게 차곡차곡 역사가 쌓인 곳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답사는 했지만 아직 답사기를 쓰지 못한 것만 책 한 권 분량이라며 “일본에서 찾아낸 조선 개화파의 흔적을 후속 저서로 계획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