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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15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창국 위원장이 질의를 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선배님이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하신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하지 않은 것은 재판부와 검찰도 알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다’라는 말씀은 실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홍성교도소에 수감된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자신의 고문 피해 공소유지 변호사(특별검사)였던 김창국(1940.10.23~2016.4.6) 변호사에게 1992년 1월5일 보낸 편지 일부다.
그로부터 4개월 바다이야기다운로드 뒤인 1992년 4월20일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마찬가지로 강기훈에게 유죄를 선고하자 그는 판결문 낭독 도중 법정을 박차고 나갔다(23년 후 2015년 5월14일 강기훈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또다시 ‘거짓’이 이기는 현실을 접하고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93년 1월 서울변협 회장 선거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그의 당선은 골드몽 예상을 뒤엎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초 민변 출신 서울변협 회장이었다. 이 외에도 ‘최초’라는 이력이 꽤 있다. 부장검사 출신 민변 회원, 민변 출신 대한변협 회장, 국가인권위원장 등. 그에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는 고단한 임무가 곧잘 주어지곤 했다.
최초 부장검사 출신 민변 회원부터 최초 민변 출신 대한변협 회장까지 새로운 길 검증완료릴게임 만들었던 고단한 여정
초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위원장에 지명된 그는 2001년 8월20일 국무총리 훈령을 토대로 인권위 설립준비기획단(준비단)을 가동시켰다. 국가기관이 신설되면 행안부 공무원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게 관례였던 당시, 정부는 준비단장 역을 할 공무원을 보내왔다. 정부가 인사권을 휘두르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격에 맞 게임몰 지 않았지만 준비단장을 맡아 이를 돌파했다. 매일 아침 9시 파견 공무원과 민간 출신 단원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준비단 회의를 주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시행일까지 3개월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인권위 운영규칙(2001.10.11) 등을 만들고 청사를 임차해 문 열 채비를 했다. 그러나 법 시행일 목전에도 정부와 직제 협상은 좀체 성사되 바다이야기게임장 지 않았다. 정부는 인권위 직원으로 100명도 많다는 기조였다. 조직의 명운이 정원 확보에 달렸다고 본 그는 직원 없이 인권위를 출범시키는 파행을 택했다.
법 시행 첫날인 2001년 11월26일 새벽부터 인권위 앞에는 진정인들의 ‘오픈런’이 벌어졌다. 위원장과 상임위원들은 진정을 접수하고 상담 업무를 수행했다. 진정인들의 호소는 구구절절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연들로 넘쳐났다. 언론은 매일 이 광경을 실어날랐다. 마침내 정원 180명(파견·계약직 포함 215명)을 확보했다. 사무처가 출범한 이듬해 4월1일까지 위원(상임 4명)밖에 없었지만, 이 기간에도 진정 접수뿐 아니라 정책 업무 수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권위 누리집을 훑어보면 인종차별철폐협약 제11차 정부 보고서 및 고문방지 협약 제2차 정부 보고서에 대한 의견 표명(2002.2.1, 2002.2.26),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의견 표명(2002.2.20), 재외동포법 관련 의견 표명(2001.12.1) 등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정책 권고 결정 전에 공청회 개최 등 의견 수렴 절차도 밟았다. 시행령, 직제령, 운영규칙 등 법령 제정도 이 시기 해낸 업무 중 하나였다. 직원 한명 없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대단한 추진력이었다.
이러한 기세는 사무처 출범 후 더욱 가속화됐다. 인권위 첫 국정감사가 열린 2003년 10월2일 법사위 국회의원들의 질의를 통해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인권위는 … 이라크 파병이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수정 권고다, 국민연금법 개정이다, 호주제다 하는 데 대한 의견을 표명하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한나라당 국회의원)
인권위 정원 확보 협상 여의치 않자 직원 없이 출범 강행하고 진정 받아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의결 “폐지 운동 역사가 한국 인권 운동사”
설립 3년 차에 접어들던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를 의결했다. 결정문 작성 과정에서 그는 초안을 출력해 붉은 펜으로 수정할 부분을 체크하다가 파일을 받아 직접 고쳤다. 그러느라 밤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이 결정을 설명하는 언론 브리핑도 직접 나섰다. 그해 10월15일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의원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권고는 적절치 않았다. … 인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에”라며 따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인권 운동사는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사입니다.”
이러한 질타는 임기 내내 계속됐다. 인권위를 불편해한 건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허가 없이 해외 출장을 갔다고 경고장을 보냈고, 이라크 파병 관련 의견 표명을 하자 한나라당의 위원장 사퇴촉구뿐 아니라 청와대 참모들도 인권위를 성토했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위는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곳”이라고 일축해 위기를 면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국회, 대통령, 대법원장 등 인권위원 추천(지명)기관은 달랐지만 초대 인권위원 동료들과 합이 맞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추천 몫 상임위원인 유현 위원은 1991년 김근태 고문사건 1심 판결을 한 재판장이었다. 2013년 11월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김창국 변호사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고문 경관 4명을 재판에 회부해 고문의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창국 위원장은 고문을 인정한 전직 판사 등과 인권위 초기 기틀을 만들었다.
독립성을 굳건히 세우고, 세금이 아깝지 않은 국가기관을 만들겠다고 고군분투했던 김창국 초대 국가인권위원장. 그가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인권위 설립준비단원으로, 인권위 직원으로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그가 그립다.
남규선/국가인권위원회 전 상임위원
“선배님이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하신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하지 않은 것은 재판부와 검찰도 알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다’라는 말씀은 실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홍성교도소에 수감된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자신의 고문 피해 공소유지 변호사(특별검사)였던 김창국(1940.10.23~2016.4.6) 변호사에게 1992년 1월5일 보낸 편지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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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거짓’이 이기는 현실을 접하고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93년 1월 서울변협 회장 선거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그의 당선은 골드몽 예상을 뒤엎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초 민변 출신 서울변협 회장이었다. 이 외에도 ‘최초’라는 이력이 꽤 있다. 부장검사 출신 민변 회원, 민변 출신 대한변협 회장, 국가인권위원장 등. 그에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는 고단한 임무가 곧잘 주어지곤 했다.
최초 부장검사 출신 민변 회원부터 최초 민변 출신 대한변협 회장까지 새로운 길 검증완료릴게임 만들었던 고단한 여정
초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위원장에 지명된 그는 2001년 8월20일 국무총리 훈령을 토대로 인권위 설립준비기획단(준비단)을 가동시켰다. 국가기관이 신설되면 행안부 공무원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게 관례였던 당시, 정부는 준비단장 역을 할 공무원을 보내왔다. 정부가 인사권을 휘두르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격에 맞 게임몰 지 않았지만 준비단장을 맡아 이를 돌파했다. 매일 아침 9시 파견 공무원과 민간 출신 단원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준비단 회의를 주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시행일까지 3개월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인권위 운영규칙(2001.10.11) 등을 만들고 청사를 임차해 문 열 채비를 했다. 그러나 법 시행일 목전에도 정부와 직제 협상은 좀체 성사되 바다이야기게임장 지 않았다. 정부는 인권위 직원으로 100명도 많다는 기조였다. 조직의 명운이 정원 확보에 달렸다고 본 그는 직원 없이 인권위를 출범시키는 파행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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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정원 확보 협상 여의치 않자 직원 없이 출범 강행하고 진정 받아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의결 “폐지 운동 역사가 한국 인권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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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국회, 대통령, 대법원장 등 인권위원 추천(지명)기관은 달랐지만 초대 인권위원 동료들과 합이 맞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추천 몫 상임위원인 유현 위원은 1991년 김근태 고문사건 1심 판결을 한 재판장이었다. 2013년 11월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김창국 변호사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고문 경관 4명을 재판에 회부해 고문의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창국 위원장은 고문을 인정한 전직 판사 등과 인권위 초기 기틀을 만들었다.
독립성을 굳건히 세우고, 세금이 아깝지 않은 국가기관을 만들겠다고 고군분투했던 김창국 초대 국가인권위원장. 그가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인권위 설립준비단원으로, 인권위 직원으로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그가 그립다.
남규선/국가인권위원회 전 상임위원